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210

본연스님 2013. 2. 11. 06:43

210. 금강심론 특별대법회(1)

이 세상에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으로 우선 우리 마음이 모양이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실존적인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동시에 여러 종교들이 자기들 교조로 받들고 있는 이른바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또는 이슬람교의 알라신이나 또는 힌두교의 바라문신이나 모두가 다 사실 모양이 없지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양이 없지만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모양을 우리가 허상적(虛像的)으로 만들 수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라 하는, 모양이 없으면서도 우리가 자기 스스로 생각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우리 마음이나 법신(法身) 부처님이라 하는 부처님도 역시 모양은 없지만 우주의 진리로 해서 존재하는 실상적(實相的)인 실존적(實存的)인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알라신이나 바라문신이나 모두가 다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따지고 보면 간단한 도리(道理)로 해서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형상이 있고 또는 이름이 있어야 이것이 따로 있고 저것이 따로 있고 하지만 모양이 없으니까 우리가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우선 간단한 논리(論理)로 본다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알라신이나 또는 바라문 신이나 우리 마음이나 똑같이 모두가 본래(本來)로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그 천착(穿鑿)을 하지 않고서 깊이 파고들라고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은 훨썩 우월하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은 저만치 훨썩 더 하열(下劣)한 것이다, 이렇게 차별(差別) 분별(分別)을 합니다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본래적으로 세계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로 있단 말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금타선사(金陀禪師)의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나와 있는 그러한 한 체계를 참고로 해서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생각합니다. 금타선사는 우리 문도(門徒)들로 해서는 「금타대화상(金咤大和尙)」그럽니다. 호칭 문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금타선사」그렇게 부릅니다. 저는 금타선사 이렇게 호칭을 하면서 말씀을 진행하겠습니다.


근대에 있어서나 또는 현대에 있어서나 우리 한국에도 훌륭한 선지식(善知識)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그런 분들도 그런대로 우리 한국불교를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큰 공헌(貢獻)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타선사도 아주 훌륭한 대선사님이신데 선지식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공부 복(福)을 더 많이 타고 나오신 분도 있고 또는 세속(世俗) 복을, 가사 권속(眷屬) 복이나 그런 복을 또 많이 타고 나신 분도 있고 하는데, 금타선사는 사실은 그분 인연(因緣)이, 그런 권속 복이나 세속 복이나 그런 복은 좀 부족하신 분이어요. 그러나 공부 복은 어느 선지식 못지않게 많이 타고나신 훌륭한 선사입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금타선사의 그러한 가르침을 조명(照明)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법집이라는 병통을 극복하는 금타선사의 가르침을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병통이 있습니다. 그 병통이 무슨 병통인고 하면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법집(法執)이란 말입니다. 무슨 법이 옳다, 내가 공부하는 법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각 종교도 자기들이 숭상하는 그러한 수행법(修行法)은 제일 낫고(높고) 그렇지 못한 것은 별 볼일이 없다고 그렇게 비하(卑下)를 한단 말입니다.


이 무서운 정보지식사회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고 한다는 그런 여러 가지의 천차만별의 분별시비(分別是非)에 있어서 가장 수승(殊勝)한 정보, 가장 위대한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가 다 비추어서 선택도 하고 또 여과를 시켜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우리 마음도 항시 불안의식(不安意識)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 법집(法執)이라. 현대적인 말로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근본주의(根本主義)fundamentalism , 교조주의(敎條主義)dogmatism입니다. 같은 공산주의로 불리는 사람들도 교조주의라, 막스 ․ 레닌이나 그 분들 말만 모두가 100프로로 옳다고 확신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 주의가 이른바 교조주의 아니겠습니까?

현실적인 사회상황도 감안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나중에 비뚤어지고 또는 파멸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 소비에트 사회를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탄압도 많이 하고 숙청도 많이 하고 했지만 가까스로 한 70년 정도 넘도록 까지 지탱하다 파멸되었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자기들이 우상같이 숭배하던 레닌의 동상마저도 끌어내리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근본주의는, 불교말로 하면 그 법집이라, 법집을 우리가 꼭 떠나야 된단 말입니다. 기독교도 구교와 신교의 싸움이라든가, 또 유태교와 기독교와의 싸움이라든가, 또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싸움 이라든가, 모두가 다 그런 그 집착이라는 근본주의 그 교주주의 때문에 그러한 무시무시한 인류사회의 해악(害惡)을 몰아오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여튼 어떤 일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극복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작은 불교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자기들 수행법만 옳다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금타선사 가르침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점을 들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성자(聖者)문제를 예를 들자면 불교도 성자가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역사적으로 빛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을 통해서 이제 그 종교를 빛내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고 그런 위대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들 종교의 성자만이 가장 위대한 성인(聖人)이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가령 유교(儒敎)라 하면 공자(孔子)님이나 맹자(孟子)님이나, 근래에 와서는 성리학(性理學)을 대성한 주자(朱子)나, 그런 분들은 위대한 성자라 하고, 다른 분들은 결국은 외도(外道)다, 이렇게 폄하(貶下)한 것이 보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의 표준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 것인가?

가령 각 종교마다 다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해서 위대하다. 그러면은 그도 역시 그야말로 참 인류사회에 대해서 큰 도움보다 혼란을 주게 되고 나중에는 이제 싸움을 야기시키게 된단 말입니다. 우선 중국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중국사회에서 그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싸움도 아주 치열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나라가 흥망하고 또는 여러 가지로 해서 그런 모든 중생들이 고난을 당하고 하는 패악이 많았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금타스님께서는 그 각 종교의 성자들, 성자들의 하나의 한계를 정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금타선사가 정한 그런 각 성자들의 한계가 인제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그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이를 믿는 사람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옳다고 생각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나올 수 있는데, 다른 종교는 그런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그러한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같은 성자라도 공부를 어떻게 얼마만큼 하는가, 또는 삼매(三昧)에 얼마만큼 깊이 드는가, 이런 것에 따라서 공부의 한계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위차(位次)가 있단 말입니다.


그 위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그 화엄경(華嚴經)의 십지론(十地論)이라, 십지경론(十地輕論)이라 그래서 따로 또 화엄경에서 갈라져서 따로 책을 내기도 했지만은, 십지경론에서, 우리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서 범부심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영원적인 진리자체인 성자의 영역에 들어가서 그 성불까지, 우리가 그런 위차를 생각할 때는 사실은 갓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그런 도인이나, 그야말로 성불(成佛)한 참 완벽한 도인이나 다 똑같은 성자의 범주에 넣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자라도 그 업장(業障)을, 불교전문적인 말로 하면 습기(習氣)를 습관성(習慣性)을 얼마만치 더 녹였는가. 거기에 따라서 맨 처음에 견성오도해서 성자된 그런 지위를 보살초지(菩薩初地)라, 보살1지(菩薩一地)라 그렇게 말하고, 더 닦아서 이지(二地), 삼지(三地) 올라가서 완벽한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다 성취해야 그래야 이른바 성불(成佛)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위차를 정했습니다만 그러한 위차에 따라서 세계의 각 종교의 교조의 성자를 감정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감정한 그것이 얼마만큼 정확 한가 그것도 또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인데 사실은 그런 문제를 어느 누구나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한갓 이론적(理論的)으로 공부를 했다고 해서 예수가 얼마만치 올라간 성자고, 마호메트가 얼마만치 닦아 올라간 위대한 분인가, 그런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거기에 걸 맞는 법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법의 능력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명히 거기에 상응된 공덕(功德)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석 三자, 밝을 明자 삼명이라. 육통은 삼명까지 포함해서 여러 가지 신통이 그기에 들어갑니다만 하여튼 삼명육통을 제대로 해야 바로 깨달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삼명육통을 못하면 아무리 자기 스스로 이제 내가 도인이다. 우리 스님이 위대한 분이고, 우리 문중(門中)을 다스리는 그런 어른이 위대한 도인이다. 이렇게 한들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실 때는 그냥 보통 그렁저렁 훤히 마음이 열려가지고서 그렇게 그냥 되신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과거 무수생(過去無數生) 동안에 그 젖어온 그 여러 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모조리 다 없애고서,

 

모조리 없애면 그냥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없애면 없앰과 동시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량공덕이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삼명육통이란 말입니다. 삼명육통을 제대로 했으면 온전한 도인이고 말입니다. 못했으면 온전한 도인이라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 같은 사람도 금타대화상, 금타선사님의 법문(法門)을 소개를 그전부터서 몇 번 하려고 벼렀어요. 벼러왔는데, 기왕 할 바에는 내 스스로 훤히 그야말로 확철대오(擴徹大悟) 해가지고 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고서 주저주저했는데 인제로 어언 간에 확철대오는 커녕 가까이도 못가면서 이제 나이가 팔십이 되었으니 인제는 미루어 놓을 수 없잖습니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歸依)했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그야말로 수승한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그 몇 생을 두고, 몇 만생을 두고 범부 노릇 많이 하고, 잘못 살아서 저 지옥도 가고, 또 축생도 되고 하다가 금생에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인간 존재의 모든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 아닙니까.


사람만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종국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야 됩니다. 부처가 안 되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이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지금 무거운 번뇌(煩惱)가 무엇인고 하면은 지금 나(我)라는 존재가 지금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있다는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란 번뇌가 제일 무거운 근본적인 번뇌입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我)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아(我)라는 것이 없다하는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 시초 초부터서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나(我)라는 것이 왜 없는 것인가?


그냥 무턱대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무슨 경이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사람 몸뚱이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현대 유물론(唯物論)과는 정 반대 아닙니까.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아닙니까. 「나」라는 것이 있지가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이 이 번뇌(煩惱)에 가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모두가 다 공(空)인 것입니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인(因)과 연(緣)따라서 이루어진 그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대상적(對相的)으로 있는 법이 유위법이 아닙니까. 대상화(對相化)시킬 수 있는 법이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져서 시간적(時間的)으로 공간적(空間的)으로 나투고 있는 것은, 이것은 그때그때 고대고대 일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가장 철학적(哲學的)이요 가장 과학적(科學的)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이것은 어느 순간도 가만히 있지가 않는 그러한 이른바 제행무상의 법이란 말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인(哲人)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다들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존재가 없는 것은 움직일 수 없지만은 존재적으로 존재가 이렇게 인간이 대상화 시켜서 볼 수 있는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움직이고 또 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초의 몇 천 분의 일도 쉬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제행무상이라, 모두가 있는 것은 그때그때 고대고대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결국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무상한 것은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볼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무아라 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 세포가 그대로 가만히 있다면 모르지만 일 초 전과 일 초 후와 몸뚱이 세포가 같지가 않습니다. 일초의 몇 조분의 일도 우리 세포가 지금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불교의 가장 중요한 술어의 하나가 즉 말하자면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왜 무아인가 하면 제행무상이라, 모두가 다 움직여서 마지않고 무상한 것은 그야말로 바로 그때는 공(空)이요, 무아란 말입니다.


너무 시간을 제가 인제 다른 옆에 나가는 말로 해서 허비해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다시 본래적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역시 그러한 법집(法執)이라든가 이른바 근본주의, 근본주의를 꼭 현대인들은 지양(止揚)을 시켜야 됩니다.  지양을 시키려면 바른 정보, 바른 정보를 우리가 알아야 그래야 인제 그 정보를 기점으로 해서 순화를 시켜서 선택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떠한 수행법(修行法)이 우리가 성불하는데 가장 요긴한 수행법인가? 그 수행법 때문에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고민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선 이제 참선하는 방법만 두고도 인제 생각해봅시다.